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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장례식을 가는 해외입국자는 코로나 자가 격리가 면제된다. 그러나 그 면제 과정이 번거로웠다. 코로나 격리 면제 신청을 위해 사망 진단서를 받은 후 영사관과 연락해 항공권 일정을 잡아야 했다. 또, 한국 입국 후 PCR 검사를 받고 8시간 이상 격리되어야 한다. 그후 방역 교통수단을 이용해 제주도로 가야했다. 그래서 장례식 날짜에 맞추어 갈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또 12월에 코로나에 걸렸었기 때문에 다 나아도 세 달 간은 PCR 검사에서 양성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 갔는데 PCR 결과가 양성이면 낭패였다. 그래서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우주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 임종은 커녕 장례식 자리도 못 지킨 게 너무 야속했다.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사람된 도리를 할 수 없는 걸까. 유학 나와서 제일 비참한 순간이 소중한 사람의 마지막을 못 지킬 때라고 선배들이 말했다. 유학 나오기 전에 할아버지가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기 때문에, 각오도 충분히 했다. 하지만 막상 겪으니 비참하고 슬펐다.

할아버지나 나나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다른 할아버지처럼 무뚝뚝하셨고, 나는 애교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께 내 존재가 자랑이며 기쁨이라는 건 명백했다. 할아버지는 온몸으로 나를 좋아하셨기 때문이었다.

잊을만 하면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용돈을 보내주셨고, 제주산 귤과 옥돔을 부쳐주셨다. A4 용지에다가 서툰 맞춤법으로 ‘ㅇㅇㅇ 보아라’로 시작하는 편지를 써주셨다. 명절에 할아버지 댁에 내려가면 말 없이 보일러를 틀어주셨다. ‘할아버지, 마트 가요.’ 하고 조르면 무뚝뚝한 성격 만큼이나 거친 운전 솜씨로 트럭을 끌고 킹마트에 데려다주셨다. 마트에서 사촌들과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고를 동안, 할아버지는 애들 좋아한다고 요구르트를 사셨다. 명절 연휴가 끝나 할아버지 댁을 떠날 때면 서운해서 우리를 마주보지도 않으려고 하셨다. 달력 속 내 대학 졸업식 날짜에 크게 동그라미 쳐두셨고, 졸업식에 왔다 가신 다음에는 우리 ㅇㅇ가 최고라고 동네방네 소문내 주셨다.

그에게 내 나름대로의 사랑으로 보답하지 못한 것은 계속 후회로 남을 것이다. 제대로 된 선물도 한 적 없고, 드문드문 드리던 전화도 마지막엔 거의 못 드렸다. 혼자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을지, 얼마나 외롭고 아프셨을지 모르겠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영상 통화를 했다. 영상 통화 화면 속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계셨다. 하지만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전화기에 대고 울부짖듯 사랑한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가 조금 웃으신 것 같았다.

어른이라면 슬픈 일도 훌훌 털고 일상으로 돌아와야겠지. 이런 일은 누구나 겪으니까. 역시 어른이 되려면 아직 한참 먼 것 같다.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그게 산 사람인 제가 편해지기 위해 비는 소망이에요. 살갑지 못한 손녀를 아껴주셔서 감사했어요.